1989 단편 애니메이션 밸런스 (Balance) 리뷰
온통 잿빛으로 물든 시공. ‘삐그덕, 삐그덕’ 이따금씩 들리는 기괴한 소리를 따라 화면도 미세하게 균형이 흔들리는 평평하고 네모난 작은 규모의 제한적인 판 위.
같은 모습과 차림을 한 다섯 명의 사람들이 둥글게 서로 등을 돌리고 서서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판의 균형(Balance)을 이루고 있다. (그들은 모두 머리카락이 없고 등에 서로 다른 숫자가 적힌 긴 롱코트를 입고 있으며 창백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각자 다른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까마득한 낭떠러지 어딘가부터 바람을 따라 메아리쳐오는 소리에 호기심이 일었을까? 한 사람이 한 걸음을 내딛자 판이 그 사람에게로 기울어지기 시작했고 다른 네 명도 본의 아니게 판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각자 앞으로 한 걸음씩을 내딛는다.
잠시 기우뚱 했던 판의 균형이 잡히자 이번엔 다른 사람이 또 한 걸음을 내딛었고 다시 다른 사람들 또한 균형을 잡기 위해 한 걸음씩을 내딛는다. 이윽고 다른 한사람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이 한 발씩을 내딛어 그들은 판의 가장자리에 이르게 된다.
판의 가장자리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한 사람이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코트의 품속에서 낚싯대를 꺼냈고 다른 이들도 그 모습을 따라 낚싯대를 꺼내 낚시를 시작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낚싯줄이 팽팽해지는 소리와 함께 판이 둔중한 소리를 내며 한 사람에게 급속도로 기울기 시작하자 각자의 자리에서 낚시를 하던 이들은 모두 판의 반대편 가장자리로 서둘러 이동하게 된다.
낚싯줄을 당겨 무거운 상자 하나를 몇 걸음 앞 판의 가장자리에 건져 올린 그자는 상자의 내용물을 확인하기 위해 상자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딛었는데 상자의 내용물이 꽤 무거웠는지 한걸음을 내딛었을 뿐인데도 상자 쪽으로 판의 전체가 기울기 시작하자 황급히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 상태로는 자신이 상자를 향해 다가갈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반대로 사람들을 향해 뒷걸음을 쳤고 판이 사람들이 많이 서있는 방향으로 기울어지자 상자가 자신에게 미끄러져 오는 것을 붙잡게 된다.
이 과정에서 나머지 사람들은 위태롭게 다시 판의 가장자리로 한데 모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것은 아랑곳 않은 채 상자를 붙든 사내가 열심히 상자의 상태를 살피자 모여 있던 사람 중의 하나가 다른 가장자리의 방향으로 한 걸음을 내딛게 되고 상자는 걸음을 옮긴 그 사람에게로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다시 상자를 건져 올렸던 사람에게로 황급히 이동하게 된다.
이기심도 용기라면 용기였는지 타인의 위태로움과 나는 아무 상관없다는 듯 상자를 쟁취하려는 사람들은 같은 행동을 서로 반복하게 되고 이윽고 한 사람이 상자의 태엽을 감아 돌리자 작게 음악 소리가 들리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이 황량한 잿빛 공간에서 멜로디 박스는 달콤한 자본권력 그 자체였기에 사람들은 그 상자를 독차지하기 위해 온갖 잔꾀와 꼼수, 폭력까지 행사하게 되고 마침내는 상자 자체에 올라타는 사람까지 나타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이미 판의 균형은 심각하게 깨졌고 상자에 올라탄 사람을 중심으로 마치 시소처럼 판이 이리저리 기울어지기를 위태롭게 반복하다 급기야는 상자를 탄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밖으로 밀어 떨어뜨리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다. 결국 상자를 탄 사람에게 밀쳐졌으나 가까스로 판의 끝을 붙잡고 매달려 있는 사람과 상자를 쟁취한 두 사람만 남은 상황.
상자를 탄 사람은 상자에서 내려 반대편 판의 끝에 매달린 마지막 한 사람마저 떨어뜨리게 된다. 그리고 다시 상자로 돌아가려 하지만 이미 살인자와 상자 간 판의 균형이 멀찍이 잡힌 뒤이다.
이 작품을 처음 본 것은 아마도 군제대 후에 졸업작품의 형식을 고민하던 중인 2001년 정도로 추측되는데 그 당시 실험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여러 작가들의 작품들을 찾아보던 중에 우연히 알게 된 작품이었다.
몇 주 전부터 현 시대상황을 보며 2010년에도 리뷰를 했지만 이번에 다시 한 번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리뷰하게 되었는데 사람들의 등 뒤에 적혀 있는 숫자의 의미는 그 당시에도 무엇을 상징하는지 잘 몰랐었고 지금 다시 봤는데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 외의 상징들이 의미하는 바는 오늘날의 상황에 비추어 봐도 꽤나 쉽게 납득이 된다.
극단적 이기주의의 끝은 결국 타인과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의 균형이 아닌 그(그들)만의 이질적인 균형만을 만들어 낸다는 것.
여기에서 상자는 모든 형태의 권력으로 비유가 가능하다. 이른바 우리가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본, 정치, 언론, 사법, 검찰 등등...
근로자들의 사망사건부터 이번 이태원 참사까지. 권력을 가진 자들과 그들에게 권력을 정말 아무생각 없이 쥐어준 자들까지... 그동안 수많은 인재로 인한 참사가 벌어져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있어서 나(우리) 외의 인간으로서의 존중과 생명의 가치는 별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
정말 그들은 그들만으로 세상의 균형이 제대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 이 작품에서처럼 별 생각 없이 사람들을 위태롭게 만들고 양심의 가책 없이 낭떠러지로 몰아 밀어 떨어뜨리고 있는 중이라 생각한다.
만날 할 줄 아는 게 종북 좌파 몰이와 내 이익만을 위한 자유, 내 권력만을 위한 공정을 외치는 그들의 사고방식이 검찰 권력의 힘을 빌어 사람들을 판의 가장자리로 내몰아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
남녀노소 더불어 함께 잘 사는 세상에 대한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복지국가로서의 철학은커녕 나만 아니면 되고 나만 잘 살면 된다는 극단적 이기주의의 결말은 이 작품의 결과가 이미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작품을 단순히 상자를 독차지 하려 했던 한 인간(집단)의 지독한 이기심의 비참한 말로로만 볼 것이 아닌, 상자를 발견했을 때 같은 판 위에 사는 공동체로서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상자를 함께 나누고 공유할 수 있었던 기회가 충분히 있었다는 것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이며 상자로 인해 빚어진 거대한 힘의 불균형에 맞서 사람들이 서로 힘을 합해 맞서지 않고 마치 나와는 상관없는 일인 것처럼 관망하거나 그룹 안에서 내분을 일으켜 힘을 분산시키는 것 또한 결국은 스스로를 위태롭게 만드는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추신. 1989년 작인 이 작품은 Wolfgang Lauenstein과 Christoph Lauenstein 쌍둥이 형제의 작품으로 스톱모션 기법으로 촬영되었으며 블랙유머가 백미인 작품인데 아카데미에서 단편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미지 출처
https://www.lauenstein.tv/balance.php
첨부한 영상이 플레이 되지 않을 경우 아래 링크 참조
https://www.youtube.com/watch?v=K4UwQMEmJXw&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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